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신 성령님
옛날 부흥 강사 목사님들 중에는 “성령 받아라! 성령 받아라!” 외치면서 “쉬익 쉬익” 소리를 내는 분들이 많았다. 그 자리에 있다 보면 정말 성령을 곧 받을 것 같은 감동과 열정이 있었다. 모두는 아니지만 어떤 성도들은 실제로 성령의 충만을 받고 엄청난 삶의 변화를 경험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부흥회는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성령님을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힘 정도로만 오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회사에는 그렇게 주장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초대교회의 단일신론파와 성령파, 종교개혁시대의 ‘소시너스파’ 등은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했다. 소시너스파는 성령을 정의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에게 흘러내리는 덕(Virtue)이나 세력(energy)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사모사타 사람 바울은 성령님을 단순히 하나님의 한 속성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많은 사람이 성령님을 아버지와 동등하신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부속물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성령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힘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신 인격의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문을 살펴보면 암탉이 알을 품듯 물로 뒤덮인 세상을 품고 계시는 모습이다. 성령께서 창조에 직접 관여하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님이 인격을 가지신 아버지와 동등하신 하나님이라는 더 확실한 증거는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을 신약의 성경 저자들이 성령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17장 7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기록되었다.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히브리서 3장 7, 8절에서 이 말씀이 인용되는데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회중에 계셨던 여호와 하나님을 성령님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이사야 6장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라는 구절이 사도행전 28절 25절에서 인용되는데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바울은 성령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예레미야 31장 33절은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기록되었다. 이것이 히브리서 10장 15절에서 인용되었는데 “~~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내가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라고 되어 있다.
이외에도 성경 곳곳에는 하나님만이 가진 절대적 속성을 성령님이 가지고 계신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영원성(히9:14), 전지성(사40:13, 고전2:10-11), 전능성(눅1:35), 무소부재(시139:7-10) 등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능력이나 부속물이 아니다. 우리가 경배하고 찬양해야 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아버지와 아들과 똑같이 찬양받으셔야 하는 분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사실이 있다. 성령님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일컬어졌다고 하여 아버지 하나님이 성령님이라는 것은 아니다. 양태론이라고 불리는 이단자들은 아버지 하나님이 때로는 아들 예수님으로, 때로는 성령님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이단 사설이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각각 구별되신 분이시다. 우리가 성령님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불리셨다는 것은 성령님도 아버지와 동등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성령님에 대해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성령님이 믿는 자 속에 내주하신다는 것이다. 믿는 자들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령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던 성전이 얼마나 소중한 곳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은 그 성전을 허무시고 이제는 믿는 자의 마음에 살고 계신다.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성경의 사상을 교리상으로 체계화시킨 것이 삼위일체 교리다. 381년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는 성령님에 대해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어,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기독교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다. 유일신이라는 말은 하나님 외에 우리가 섬길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 아버지 하나님만 하나님으로 믿고 예수님이나 성령님을 열등한 어떤 신적 존재나 힘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성령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이시라면 우리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죄인 된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구약시대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사람들은 죄인이니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셔서 사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피 때문이다. 그 피 때문에 믿는 자들이 정결하게 되었고, 거룩하게 되었기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성전으로 삼으셔서 살게 되신 것이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사신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거룩하고 존귀한 존재가 되었는지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값비싼 산삼을 담는 포장용 기는 마트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비닐봉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프리미엄 휴대전화기들은 상자도 아무것이나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믿는 자들의 마음은 우리가 볼 때는 비록 연약하여 넘어지고, 늘 유혹받고 쓰러지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눈에는 지극히 거룩한 성전이 되었다. 그래서 성령님은 믿는 자의 마음에 거하길 꺼리지 않으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확실하게 거룩하게 되었는지를 증명해 준다. 그러니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뉴스코리아 칼럼 기영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