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시는 하나님
기다리시는 하나님
샌안토니오에 사는 맥스 루케이도 목사는 기독교 작가 금상을 일곱 번이나 받은 탁월한 작가이다. 서정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를 통해 많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는 작가이고 목회자이지만 그도 연약한 사람이었다. A Love Worth Giving 이라는 책에서 루케이도 목사 큰 실수를 할 뻔 했던 일에 대한 간증을 읽은 적이 있다. 루케이도 목사는 당시 교회의 직원들과 함께 유명한 리더십 세미나에 참석하던 중이었다. 너무 모임을 기대했던 탓에 맨 앞줄에 앉아서 강의를 듣고자 했다. 드디어 기대하던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강의가 시작되면서부터 자꾸 뒤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짜증이 났지만 조금 있으면 그만 두겠지 하고는 참았다고 한다. 그런데 강의가 종반에 접어 들 때까지 그 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결국 참다 못하고 루케이도 목사는 뒤를 돌아보고 “조용히 좀 하실 수 없어요” 라고 한마디 하려던 그때였다. 강사가 갑자기 강의를 중단하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여러분 죄송합니다. 강의 전에 먼저 소개했어야 했는데 오늘 소개할 귀한 분들이 계십니다. 그 중 한 분은 루마니아에서 개척교회를 섬기는 장로님 이십니다. 이 집회를 사모해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영어를 몰라 다른 분이 통역을 해주고 계십니다. 잠깐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바로 뒤에 그 속삭이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예전 CCC의 찬양 팀 리더였던 최용덕 간사의 글에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찬양 팀이 어떤 교회에서 열심히 찬양을 인도하며 집회를 할 때 매우 거슬리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모두가 기쁨으로 손뼉을 치는데, 중간에 어떤 사람이 자꾸 자기 뺨을 때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단의 방해처럼 여겨질 정도로 거슬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집회가 끝나고 그 사람이 그를 찾아와 인사를 하는데 깜짝 놀라고 말았다고 한다. 그는 한쪽 팔이 없는 사람이었다. 팔이 없으니 손뼉을 칠수 없어 자기 뺨을 때리며 소리를 내어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해 못할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자주 접하게 된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수 밖에 없을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러한 상황은 우리가 그들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상스런 행동을 비판하고 공격한다. 이러한 공격은 상대방을 분노하게 만들어 큰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가끔 발생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관계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의 상당수는 조금 기다리다 보면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앞서 소개한 루케이도 목사는 그나마 강의 종반까지 기다렸기에 큰 실수를 모면할 수 있었다. 만약 통역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다짜고짜로 조용히 좀 하라고 다그쳤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기다림의 가치는 그래서 중요하다. 서로를 이해할 시간을 벌어준다. 잘못된 사람들의 행동을 교정해줄 공간을 만들어 준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기다리는 하나님이시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택해서 세운 왕이었다. 그는 겸손했고 용감한 젊은이 이었다. 그런 그가 결정적으로 몰락하게 된 것은 기다리지 못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가 왕이 된지 1년이 지난 후 블레셋과의 큰 전쟁이 발생했다. 늘 블레셋에게 유린당하던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이 되었는데 이에 분노한 블레셋은 수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믹마스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이스라엘은 모두 무서워서 떨고 있었다. 더군다나 사무엘이 와서 제사를 드려줘야 용기가 생길 것 같은데 사무엘은 약속된 날짜보다 7일이나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다. 두려워하던 백성들은 하나 둘씩 도망가기 시작했다. 기다리다 못한 사울은 제물을 가져오라고 명령하고 자신이 번제를 드리게 된다. 그러나 번제가 드려지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한다.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이 일을 계기로 사울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는다. 그런데 사울은 그 이후로도 39년을 통치한다. 하나님은 오랜 동안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정치하길 기다리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그는 10년을 기다리다가 더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게 된다. 이로 인해 가정에 문제와 아픔을 경험해야 했고 지금의 중동문제에 불씨를 만들어 놓게 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숙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100세에 약속대로 이삭을 주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의 계보를 세워 가셨다.
하나님은 공의 로운 분이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그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어떤 무신론 교수가 학생들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구 욕을 했다. 그는 말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심판하는 공의 로운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내가 이렇게 욕을 했는데도 심판하지 않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때 학생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교수님 그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 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다. 여기서 나타난 예수님은 기다리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죽은 자도 살려내는 분이지만, 우리가 마음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린다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을 그린 그림을 보면 예수님이 두드리는 문에 바깥에는 문고리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 말도 조급하게 말하기보다 듣기를 힘써야 한다. 이웃이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되어도 그 이유를 알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조급함이 화를 만든다. 이 말은 미루라는 의미가 아니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타난 사랑의 속성 가운데 가장 첫 번째는 사랑은 오래 참고이다. 기다리는 것이 사랑이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으셨다면 이미 우리는 우리가 범한 죄 때문에 지옥에 열두 번도 더 들어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며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다.
기영렬 목사